미수반 × 여우비 크로스오버
날조가 치사량 이상으로 들어있습니다. 주의!
본 이야기는 글쓴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이며 실제 설정과 다른 부분이 상당수 존재합니다.
시야 전환 및 시간선의 흐름은 점 3개의 구분선으로 통일합니다.
추천 BGM :: https://youtu.be/K15j5NvUroE
靑玉
우리는 죽어서 이상(理想)을 바랐다.
그 세상이 이상(異相)일지라도, 우리는 이상(理想)을 바랐다.
제 13막.
이상(理想)(3)
시체 썩은 내.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지독한 환상.
끼익, 불협화음의 철조망 소리. 극심한 온도차의 세 가지 시선. 그중 플래시를 든 검은 우비의 남성은 꼭 그들을 쓰레기라도 보는 양 차갑기 그지없다. 남성의 뒤로는 희고 매캐한 연기가, 손에는 간악한 총구를. 총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주둥이가 길고 소리 없이 사람을 쓰러뜨린다. 쓰러진 사람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가슴깨 언저리를 붙잡은 남성은 꼭 심장에 총알이 박힌 듯 숨을 헐떡였다. 바라보던 이는 이내 심장이 요동친다. 두근, 두근. 감정이 고조되듯 두려움과 동시에 분노의 감각이 그를 덮쳤다. 손 끝이 파르르 떨리고 주먹을 쥔 손아귀가 이따금 따끔거렸다. 분명 피가 나는 것이다.
철조망 너머의 이들은 반쯤 숨을 참았다. 왜 그날, 왜 이들만이 구치소에 있었을까? 그런 감상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꼭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수순인양 흘렀으니, 내부에 스파이라도 있지 않는 이상 이렇기도 쉽지 않겠지.
그는 침을 삼켰다. 목울대 없는 그는 눈동자의 핏대가 터지도록 세우고서 우비의 남성을 노려봤다. 우비의 남성은 마스크를 쓴 채였고, 여성은 무엇도 무장하지 못한 상태였다.
남성은 입을 열었다. 끔뻑거리는 입모양 사이로 알아볼 수 있는 건 단 한 줄, 다 네 탓이야. 우비의 남성은 그리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은 문장이 모두 끝맺기 전부터 시야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닫음과 동시에 절명하듯 눈물이 흐른다. 콧방울과 양 볼을 태울 감정의 흐름에 덕개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급격히 변화하는 감정선 사이로 알 수 있는 감각은 단 하나. 뜨겁고, 코끝이 따가울 정도의 열감. 마치 눈에서 핏물이 왈칵 흐르듯, 눈 안에서 용암이 흐르듯. 서러움을 넘어 괴로움을 느낀다.
그의 앞에 떨어진 매서운 칼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남성은 입을 벙긋거렸다. 그가 흘리는 눈물이 바닥으로 쏟아져 손바닥을 적실 무렵,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는 분노를 넘어 체념을 느낀다. 곧네 목까지 가져다 댄 칼 끝은 희게 빛나고, 목에 칼을 댄 이의 얼굴은 죽음을 앞둔 이 치고 대비될 정도로 붉다. 피부에 맞닿은 칼에 숨을 헉, 들이킬 정도이나 체념한 그는 꼭 그렇지도 않다. 이것이 당연한 순리인양 자연스레 쥐는 것이다.
그리고 뚝, 뚝.
숨을 가파르게 쉰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 단말마적인 숨소리, 고통. 그리고 절망감. 체념, 설움. 그 사이로 피어나는 누군가의 환희.
피어오른 연기가 감정을 혼돈으로 밀어 넣는다. 철조망 너머의 사람에게 시선이 닿는다. 그 눈동자가 맞아들 때, 철조망 너머의 이는 소리 없는 공포감을 맞이했다. 숨이 사그라들기까지 채 10분이 남지 않는다. 1분, 2분. 고통이 사라질 무렵까지, 이제 3분도 채 남지 않았다.
피가 온 바닥을 적실동안 왜 그 안에 모두가 아무 대처도 하지 못했을까. 삶을 포기한 이들이기에? 하지만 그가 들어온 직후까지만 해도 피해자는 그를 증오했다. 그것은 명백히 사실. 그렇다면 그가 쓰고 온 마스크. 마스크?
덕개는 코를 틀어막았다. 그것은 향을 가지고 있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 그것은 냄새가 났던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이내 닦아냈다. 입술을 짓누른 손바닥은 다소 역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꼭 속을 뒤엎는 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생각한 것이다. 매캐하고, 지독한 연기. 독? 독인가? 아니. 아니, 이건.
"덕개야?"
덕개는 공룡을 바라본다. 손아귀가 땀범벅이다. 시신은 입을 열지 않는다. 죽은 이에게 답을 구한다는 것부터 세상의 이치와 동떨어진 일이지. 그렇다면 그들의 입은 어떻게 열게 하는가. 덕개는 찰나를 생각한다. 심령수사. 이름만 거창한 그것은 실질적으로 물증을 쥐어주지 않았다. 추리하는 이들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는 심령수사이기도 하며, 대체적으로 제정신인 사람이 몇 없으니 당연할 따름.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들을 찾는다. 사건을 빨리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 그리고 입을 열게 하는 이들은 대부분 끔찍한 환상통을 겪는다. 이치에 맞지 않은 짓을 했으니 당연할 따름이다.
덕개는 파르르 떨리는 입을 열었다. 무엇을 이야기하면 좋을까. 어떻게 이야기해야 수사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갈무리 짓지 못하던 덕개는 이내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입만 끔뻑이다 다시금 닫는다. 공룡에게서 시선을 내려버린 것이다.
덕개는 이 모든 상황이 끔찍했다. 자신만이 봐버린 세상이라거나, 지독한 연기의 종류라던가. 사람이 죽어가는 찰나도 한몫할 것이고, 아직 듣지 못한 심령수사의 끝을 봐야한다는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허나 그중 가장 최악인 점은, 덕개 앞에 공룡이 있다는 점이다.
공룡은 냉철했다. 범인을 앞에 두고서도 비범했다. 정확한 물증이 없으면 들쑤시는 것도 조심스럽다. 종종 이것을 보고 겁쟁이라 말한 사람도 있었으나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그리 말한 이가 이렇게 행했다면 비겁한 것이고, 그가 이리 행동했다면 응당 필요한 일 중 하나라는 소리다. 그리고 덕개는 공룡이 아니었다. 물증? 단서? 그런 것과는 동떨어진 힌트. 초현실성을 앞에 두고 그는 공포심에 몸부림친다. 비명? 두려움? 공포? 그 모든 것이 나쁜 일은 아닐 터인데. 허나 덕개는 알고 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나쁘지 않은 것도 없다. 나쁜 것, 그리고 더욱 나쁜 것. 그 둘밖에 없는 것이다. 덕개는 적막함을 자신의 두려움으로 깨고 싶지 않았다.
적막함을 자신의 부족함으로 깨고 싶지 않았다.
공룡은 그가 말하고도 한참 동안 대답이 오지 않는 덕개에 미묘한 긴장감을 느낀다. 왜 아무말도 안해? 그 오만한 이가 타인을 배려하고자 입을 열었음에도 덕개는 한참동안 함구함을 택했다. 자신이 보이는 세상이 퍽 잔혹하기 때문이 분명하다.
덕개의 표정은 점차 창백해진다. 세상이 빙글 도는 감상도 피할 수 없다. 속이 울렁거리고, 현실의 소리와 가상의 소리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옆에서 속삭이는 이들은 재차 강조한다. 귀를 기울이거라. 더 깊은 심연을 보아야 한다. 들어라, 느껴라, 맡아라. 이 안에서 더 큰 무언가가 있다는 양 그것은 덕개를 독촉했다. 이 안에서 무엇을 더 보라고? 덕개는 눈 사이를 엄지로 누르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감각을 곤두세워도 이 이상의 무언가를 붙잡을 수 없다. 구슬을 손에서 놓으면 이것마저 사라질까. 말도 안 되는 상상 끝에 현실감을 되찾는다.
공룡이 그의 손을 붙잡은 것이다.
아프냐? 장난스래 웃어 보이는 공룡에 덕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픈가? 그는 자신이 아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을 향한 추모가 부족해 그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거다.
죽은 이란 본래 이성이 없다. 감정적이고, 원초적이며, 특정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것은 보통 두려움이나 공포, 집착 등 고유의 감정을 뜻하곤 한다. 돌아봐 줘, 도와줘, 살려주세요. 그들이 그리 말하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의 분노나, 공포나, 삶에 대한, 혹은 누군가를 향한 강한 집착은 혼을 오래 지상에 붙들게 하난 원천인 셈이다. 뭐, 오래라고 말해봐야 과장해도 2일이 최대이지만 말이다.
덕개는 그 2일을 넘기고자 가뒀다. 이 정도로 이성적이며 짙은 분노에 차오른 혼은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덕개의 침묵에 공룡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공룡은 앞선 질문이 의뭉스럽다. 왜 물어본 거지? 죽은 피해자, 신내림. 그리고 생각한다. 또 다른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어?
이쯤에서 잠경위라면 그 비상한 추리 실력으로 추론을 했을 터인데. 그는 단서를 모으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다. 단서. 참 좋은 단어다. 이어 붙이는 것이 부족할지언정 심증은 만들 수 있으니. 나아가 심증이 모이면 물증이 된다. 사건의 개연성을 만들고 추론에 추론을 덧입힌다.
공룡은 다시금 물어본다. 괜찮은 거 맞지?
덕개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자. 우리 여기서 더 있다간 땡땡이친다고 수경사님한테 혼난다."
공룡은 덕개의 손을 놓는다. 소리는 덕개를 물어뜯을 기세로 다시금 달려들었다. 몰려들었다. 집중해, 귀를 기울여봐. 한없이 서러운 이들의 울음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난 무서워. 무엇을 말했든 그 사람에게서 도망치고 싶을 거야.
덕개는 여전히 기분이 오묘했다. 온갖 것들이 들이닥쳐 말도 안 되는 소음을 퍼뜨리고 있는 와중에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가 숨을 턱턱 막지 않았고, 들이키기만 해도 코가 비틀어질 것 같던 세상이 종말이라도 해버린 양 느껴지지 않았다. 덕개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공룡의 손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공룡은 의자를 끌며 일어난지 오래였다.
침대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 끽해봐야 15분째. 휴식시간이라고 한다면 휴식시간일 것이고, 농땡이라고 한다면 농땡이일 15분. 그동안 덕개는 환상통을 겪었다.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말이다.
덕개는 옷맵시를 정리했다. 공룡은 신발 앞꿈치를 툭툭, 바닥에 가볍게 쳐본다.
"네. 곧 돌아오시겠네요."
"발소리 들렸어?"
"아뇨, 전화가 곧 끊길 것 같거든요."
전화? 손목 카라를 정리하던 공룡이 그를 향해 재차 물었다. 그의 물음에 덕개는 고개를 주억였다. 공룡은 그의 말이 퍽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로 연락을 넣은 거지? 호기심이 피어올라도 묻지 않는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기민하게 세운 청각이 취조실을 넘어 관할서 밖의 소리까지 주워듣는다. 바쁜 타자소리, 급하게 움직이는 팩스 소리, 분주한 발걸음, 울리는 전화소리. 그 사이 짜증스러운 몇 마디.
"어디로 집합하는지는 들었어요?"
"심령수사 하고 있을 때 힘쟁이가 연락했다. 경찰서 주변에 양아치 잡아다가 심문했대."
"그래도 되는 거예요?"
"모르지?"
능청스래 이야기한 공룡에 덕개는 그저 허, 웃음만 내짓는다. 관할서 밖, 누군가의 목소리는 라경장님이구나. 덕개는 확신했다.
"그래서 간도 크게 여기서 죽치고 있었다 이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면 뭐, 내가 오목눈이인지 확인해 보라더냐?"
양아치는 점차 당황하기 시작한다.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 불같이 사나운 성격, 성난 팔근육. 아마 악력조차 무시무시할 것이고, 그 악력 덕분에 손아귀에 붙잡히면 우그러질 것이다. 곧장 뭉개질 것이다. 그래서 수갑에 손목이 칭칭 감긴채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구치소 대신 이 괴팍한 형사 옆에서 대롱대롱 묶인 체 울고 있을 것이다. 그리 확신한 소년은 점차 말투가 누그러뜨렸다. 누그러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니…. 소년은 그렇게 몇 번이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라더는 그를 위아래로 훑는다. 끽해봐야 10대, 높게 쳐줘봐야 20대 초반. 고등학생이라면 훤칠한 것이고, 아니라면 삐쩍 말랐다고 봐야 마땅한 신체 사이즈. 피부색이든, 얼굴 혈색이든. 척보기에도 몸 상태가 딱히 좋아 보이지 않는다. 손톱은 물어뜯었는지 너덜너덜하고, 눈밑은 지독할 정도의 다크서클이 자리잡아 문신처럼 세겨졌다. 수면부족? 손톱 상태를 보아 유아퇴행도 의심된다. 어찌 됐든 양아치라 불리기에 과분하기 짝이 없는 이른바 소년이다만, 그가 손으로 꺼낸 담배 꽉은 마냥 소년으로 부르기 애매했다. 최소한 비행청소년, 속 된 말로 양아치에 입각했다. 그는 소년의 눈에도 주목했다. 피도 안 마른 놈의 눈동자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꼭 술이라도 퍼마신 양 동공이 심히 풀려있다.
지금 그가 왜 소년을 심문하고 있는가 물으면, 곧장 벌어진 사건과 더불어 소년의 품에서 담배가 삐죽 튀어나왔다. 통화를 하는 것도 들었다. 분명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것 같은데, 입에서는 청혼교가 튀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왜 눈을 부라렸냐?"
"제가 부라렸다뇨. 진짜 아니라니까요…."
"네가 방금 뭘 말했는지도 기억 안 나냐?"
아니… 소년은 입을 웅얼거렸다. 수면부족의 문제인가? 아니면 청소년 우울장애거나. 소년은 단어 자체를 고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가 됐든 그가 알바는 아니지만. 라더는 소년을 바라보다 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양아치야. 경찰서 앞에서 담배나 피고 말이야. 그건 내놓고 꺼져.
라더의 말에도 소년은 여전히 아니, 아니, 아니. 반복적으로 같은 말만 지속했다. 이쯤 되니 이상하게 느껴진다. 약이라도 했나? 왜 이러는 거야. 라더는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은 최대한 그와 눈동자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야."
"……."
"대답 안 해?"
"… 아니…. 그……."
보통의 사람이라면 어떻게 답하는가? 보통은 너무 놀라 네? 하며 고개를 들기도 하고, 혓바닥을 씹거나, 간이 너무 부운 나머지 대답조차 안 하기 마련이었다. 그럼 눈앞에 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천천히 입을 여는 것도, 조심스럽게 구는 것도. 모두 성격의 한 종류라 보기엔 다소 어색했다. 다시금 보자니 귀에 달린 피어싱은 4개, 반지는 2개, 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달았고, 주머니에는 담배꽉과 라이터, 길게 난 앞머리 사이, 눈썹에는 스크레치가 나있다. 학교에서 날라리로 불리기 딱 좋을 녀석.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질 수 없는 외향성이 행동 하나로 가려지려 했다.
"어이 양아치."
"……."
"너 혹시, 약했냐?"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손 끝을 가만두지 못한다. 엄지와 검지를 교차하며 매만지고, 튕기고, 반복적으로 팔을 긁어내 린다. 반팔의 의복은 활동성과 함께 신체를 노출시켰다. 팔이 붉게 물들어 두드러기가 올랐다. 알레르기성 두드러기, 아니면 그저 땀띠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방금 그 한 마디가 없었으면 이런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너, 마약 했구나."
라더는 허, 웃음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미친. 드디어 세상이 미치고 말았군. 그는 소년을 바라보다 이내 하늘을 쳐다보았다. 신은 믿어본 적 없다. 구원의 종류따위 믿어본 적도 없고, 노력으로 올라온 이 자리를 신따위에게 쉽사리 내어줄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눈을 가리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이다. 나아가 덧없을 신을 믿어 아이 하나의 인생이 이모양 이꼬라지로 추락한 마당에 무슨 신을 또 믿겠는가. 그는 이제 이 소년을 양아치를 넘어서 불쌍한 학생쯤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누가 너한테 그거 알려주대? 라더는 여전히 눈을 가린 채 물었다.
"… 알려준 사람은 없어요."
"그거 준 사람은 있을 거 아니야."
"……."
"야, 안 말해?"
학생은 참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아침이 너무 밝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창문만 열면 하루를 시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못 이겨 커튼을 쳤다. 얇은 커튼만 4개를 치니 햇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남들 다 가는 학교, 그마저도 갈 수 없다. 그게 너무 서러워 주머니를 뒤졌다. 사람 사는 것이 퍽 쓰레기 같아 청소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꿋꿋이 살아있었는데, 주머니를 뒤져도 나오는 것은 빈 담배 꽉 하나. 학생은, 소년은.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숨막히는 혈전을 뚫고 기어 나왔는데, 어째서 이런 일에 맞닥뜨린 것인지. 소년은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신선동…."
"… 신선동?"
"신선동, 선월도 역사, 박물관..."
"거기가 왜."
선월도. 일제 강점기 시절 무역로 중 하나로 쓰였던 곳. 경기도 내에 몇 없는 아픈 역사를 지녔던 곳. 이제는 신선동 재건축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와 함께 지도 자체가 뒤바뀌었지만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개발 중단을 외쳤던 것도 그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강압적으로 일을 진행시켰다. 수도 근처, 경기도 내에 이런 뼈아픈 역사를 남겨두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월도 사람들을 간첩이다, 매국노다, 있는 대로 욕을 해댔다. 그들이 매국노라는 증거는 없었으나 정황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무역로였기 때문이겠지. 돈이라도 받아먹었겠거니. 그렇게 확신한 것이다.
라더는 소년을 응시했다. 강압적인 질문은 그에게 있어 당연한 것이다. 취조 따위 배운 적 없고, 있다고 해도 방식이 바뀔 일은 없다. 그저 알아야 하므로 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거, 그, 거기, 서어-."
이내 소년은 울음을 터뜨린다. 앞머리가 눈을 찌를 것처럼 길고, 팔 곳곳에는 긁힌, 아니 긁은 자국이 남았다. 눈밑에 다크서클이나 손톱을 물어뜯은 자국. 그 모든 게 금단 증상이 분명하다. 그는 소년을 달랠 방법 따위 알지 못했다. 지금 당장 수경사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없다. 그는 일단 소년을 앉혀본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이나 소년에게는 더욱 겁을 주는 일임은 아직 모르고 있다.
"거기서?"
"제, 저, 그, 저희, 흐으-, 저희 어, 엄마가……."
더듬더듬 짚어나간다. 엄마가 쫓겨났어요. 아빠는 엄마를 버리고 떠난 지 오래고, 엄마는 그곳에 독실한 신자였어요. 가족 전체가 독실한 신자였죠. 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랬어요. 교단은 우리한테 많은 걸 지원해줬어요. 내 교육비도 지원해줬고, 저희 집 월세나 전기세, 통화세까지 지원해줬죠. 그런데, 얼마 전에 쫓겨났어요. 나도, 우리 할머니도 같이. 마치 막아둔 댐이 터진 것처럼 터져 흘렀다.
학생은 서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곳은 신을 믿는 곳이고, 믿는 자만이 신에게 선택받는다 확신했으니. 그 교리는 푸른 불꽃을 타고 흘러 죽음을 넘나드는 힘을 부여했고, 실제로 아픈 이들이 낫는 기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의심한 적 없었다. 그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가 비틀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학생은 눈두덩이를 짓누르듯 닦아냈다. 할머니가 그랬어요. 아빠가 일을 그르쳤대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우리가 쫓겨나는 이유는 제 아빠 탓이래요. 그리고 우리 아빠가 여기 있대요. 여기, 구치소에.
학생은 숨을 몰아 내쉰다. 라더는 아까부터 드는 미묘한 이질감에 기시함을 느낀다. 독실한 신자, 쫓겨나다, 아버지, 구치소?
"……. 너희 아버지는 누군데."
"저, 제, 제 아… 빠요……?"
"그래. 너희 아버지."
"저, 저희, 아, 아버지는-"
'뜰팁(소설) > 靑玉' 카테고리의 다른 글
靑玉. #15. 추격(1) (3) | 2023.01.20 |
---|---|
靑玉. #14. 이상(理想)(4) (3) | 2022.12.31 |
靑玉. #12. 이상(理想)(2) (0) | 2022.11.01 |
靑玉. #11.이상(理想)(1) (0) | 2022.10.24 |
靑玉. #10 조력자 (1) | 2022.10.04 |